[대통령긴급조치위반·국가보안법위반·내란예비음모·반공법위반] 확정[각공2006.2.10.(30),419]
【판시사항】
[1] 대통령긴급조치에 의하여 설치되었던 비상보통군법회의의 판결에 대한 재심청구사건의 재판관할권이 일반 법원에 있다고 한 사례
[2]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재조사를 권고한 이른바 ‘인혁당재건위 사건’에 대한 재심청구 사안에서, 형사소송법 제420조 제7호 및 제422조에서 정한 재심사유가 있다고 판단하여 재심개시결정을 한 사례
【결정요지】
[1] 대통령긴급조치에 의하여 설치되었던 비상보통군법회의의 판결에 대한 재심청구사건의 재판관할권이 일반 법원에 있다고 한 사례.
[2]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재조사를 권고한 이른바 ‘인혁당재건위 사건’에 대한 재심청구 사안에서, 형사소송법 제420조 제7호 및 제422조에서 정한 재심사유가 있다고 판단하여 재심개시결정을 한 사례.
【참조조문】
[1] 형사소송법 제423조, 헌법 제27조 제2항, 제101조, 제110조, 군사법원법 제2조 제1항, 제3조 제1항, 계엄법 제10조 제1항, 제14조 / [2] 형사소송법 제420조 제7호, 제422조【전 문】 【피 고 인】 피고인 1외 7인
【재심청구인】 피고인 1의 배우자 재심청구인 1외 7인
【검 사】 박찬일외 1인
【변 호 인】 법무법인 덕수 담당변호사 이돈명외 7인
【재심대상판결】 1. 1974. 1. 8. 선포된 대통령긴급조치 제2호에 의하여 설치된 비상보통군법회의 1974. 7. 11. 선고 74비보군형공 제15, 16호 판결 중 피고인 1, 2, 3, 4, 5, 6, 7 부분 / 2. 같은 비상보통군법회의 1974. 7. 13. 선고 74비보군형공 제14, 17, 18호 판결 중 피고인 8 부분
【주 문】
각 재심대상판결에 대하여 재심을 개시한다.
【이 유】
1. 재심대상판결의 확정
각 판결문 등본 및 사형명령집행부[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의문사위’라고 한다) 직권 제84호 공소외 1 사건 기록 사본(이하 ‘의문사위 기록’이라고 한다) 12-7권 2076~2123쪽]의 기재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사실이 인정된다.
가. 각 재심대상판결의 범죄사실의 요지
피고인들은, 북괴가 정부를 참칭하고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불법으로 조직된 반국가단체로서 공산주의 제도와 이념의 우월성을 선전하고 남한 내의 동조세력을 구축하여 남한의 공산화 혁명을 유발시키려는 활동으로 적화통일을 획책하고 있다는 점을 지실함에도 불구하고, 국가를 변란하고 국헌을 문란하게 하여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할 목적으로, 동지들을 규합하여 공산비밀지하조직인 과거 인민혁명당과 같은 조직을 건설하여 혁명역량을 비축하고 전국적으로 조직적인 학생데모를 선동하여 정부를 혼란시켜 국가기관을 강점하는 공산 폭력혁명으로 정부를 전복시킨 다음 북괴와 영합한 통일된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려는 결의하에,
피고인 3, 7, 4, 2, 8 등은 인민혁명당 재건을 위한 공산비밀지하조직인 경북지도부를 조직하기로 한 후 피고인 3, 7을 그 지도위원으로, 피고인 4를 조직책으로, 피고인 2를 자금조달책으로, 피고인 8을 학원조정책으로 정하여 반국가단체인 경북지도부를 결성하고, “조직을 확대하여 정부를 전복한 다음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한다.”는 목표하에, 피고인 3은 피고인 4로부터 정부를 비방하는 등의 내용의 “반독재구국선언문”을 작성하여 달라는 의뢰를 받아 초안을 작성하고, 피고인 8이 이를 완성하여 대학집회 등에서 반포하고, 피고인 2는 피고인 4로 하여금 북한방송 중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사업총화보고문을 청취한 후 이를 노트에 기재하게 하고, 피고인 3, 5, 피고인 1, 7 등은 인민혁명당 재건을 위한 공산비밀지하조직인 서울지도부를 구성하기로 한 후 피고인 3, 7을 지도위원으로 정하고, 피고인 5는 피고인 4가 작성한 북한방송을 청취한 위 노트를 탐독한 후 이것이 남조선인민의 자주적 역량으로 정부를 전복하라는 지령으로 판단하고 이에 동조하여 피고인 4가 작성한 위 노트를 탐독한 피고인 6, 피고인 1 등과 회합하여 남한의 공산혁명을 위하여 서울지도부를 결성하고, 정부를 전복하여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목적으로 회합 또는 북한방송 청취 등을 통해 공산주의 이념학습을 하고, 피고인 8은 피고인 3, 4 등의 지령을 받고 서울지도부의 지도하에 전국적 규모의 학생데모를 유발시켜 민중의 호응으로 정부를 전복하는 데 중심체가 될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하 ‘민청학련’이라고 한다)을 조직하여 그 구성원으로 활동하고, 피고인들은 당시 헌법을 개정하고 대통령긴급조치를 철폐하여야 한다는 등으로 합의하고, 민청학련의 활동에 관여하고 그 구성원들과 회합하고 그 행위내용의 전부를 수사·정보기관에 출석하여 숨김없이 고지하지 아니하는 등으로
반국가단체를 결성하고, 내란을 예비음모하고, 북괴의 활동을 찬양·고무·동조하여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하고, 그와 같은 목적으로 표현물을 제작·보관·반포하고(피고인 7, 피고인 1은 제외), 대한민국 헌법 및 대통령긴급조치 제1호를 비방하는 등 대통령긴급조치 제1호를 위반하고, 민청학련의 활동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고 민청학련 구성원들과 회합·편의제공·통신연락 등을 하는 등 대통령긴급조치 제4호를 위반하였다.
나. 각 재심대상판결의 선고내용, 확정 및 집행
피고인들은 위와 같은 범죄사실에 대하여, 대통령긴급조치 위반죄, 국가보안법 위반죄, 내란예비음모죄, 반공법 위반죄로, 피고인 1, 2, 3, 4, 5, 6, 7은 1974. 1. 8. 선포된 대통령긴급조치 제2호에 의하여 설치된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1974. 7. 11. 전자의 재심대상판결에 의하여, 피고인 8은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같은 달 13일 후자의 재심대상판결에 의하여 모두 사형을 선고받고, 항소심에서 각 재심대상사건이 병합되어 1974. 9. 7. 비상고등군법회의 74비고군형항 제14, 15, 16호 판결로 피고인들의 항소가 모두 기각되었으며, 1975. 4. 8. 대법원 74도3323 판결로 피고인들의 상고가 모두 기각되어, 각 재심대상판결이 그대로 확정되었다. 한편 1975. 4. 8.자 비상고등군법회의 검찰부 검찰관의 형집행지휘 및 국방부장관의 사형집행명령에 의하여, 각 재심대상판결이 확정된 다음날인 1975. 4. 9. 피고인들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어 피고인들은 모두 사망하였다.
2. 재심청구이유의 요지
재심청구인 8을 제외한 나머지 재심청구인들은 2002. 12. 10. 전자의 재심대상판결에 대하여, 재심청구인 8은 2003. 7. 22. 후자의 재심대상판결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형사소송법 제420조 제1, 5, 7호의 재심사유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 법원에 그 재심을 청구하였다.
피고인들은 법정에서 공소사실을 인정한 바 없음에도 공판조서에는 공소사실을 모두 시인한 것으로 변조되었고, 피고인들에 대한 피의자신문조서는 그 수사장소, 수사일시가 모두 사실과 다를 뿐 아니라 그 내용 역시 피고인들의 진술과 달리 기재되어 변조되었으며, 수사과정에서 수사관들이 피고인들에 대하여 고문 등 가혹행위를 하는 등으로 증거를 조작하였다.
그런데 의문사위가 피고인들이 관련된 소위 “인혁당재건위(각 재심대상판결의 범죄사실에 포함된 ‘경북지도부 등 인민혁명당 재건을 위한 공산비밀지하조직’을 의미한다) 사건”은 재판과정에서 공판조서가 변조되고 피고인들의 변론권이 부정되는 등의 불법이 있었고, 피고인들에 대한 피의자신문조서는 수사과정에서의 고문과 협박에 의하여 조작되는 등 사건이 조작되었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이는 무죄를 인정할 명백한 증거가 새로이 발견된 것이므로 형사소송법 제420조 제5호 소정의 재심사유에 해당하고, 또한 위와 같은 공판조서와 피의자신문조서의 변조는 같은 조 제1호 소정의 재심사유에 해당하며, 수사관의 피고인들에 대한 고문 등 가혹행위는 같은 조 제7호 소정의 재심사유에 해당한다. 그리고 후 2자의 재심사유에 관하여는 이미 공소시효가 지나 확정판결을 얻을 수 없으나 의문사위의 위와 같은 판단은 같은 법 제422조 소정의 확정판결에 갈음한 증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3. 재판권 및 관할권에 대한 판단
가. 관련 규정
재심청구사건의 관할에 관하여, 군법회의법이 1987. 12. 4. 법률 제3993호로 전문개정된 군사법원법 제472조 본문은 “재심의 청구는 원판결을 한 대법원 또는 군사법원이 관할한다.”고 규정하고 있고, 형사소송법 제423조는 “재심의 청구는 원판결의 법원이 관할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 사건 각 재심대상판결은 구 헌법(1972. 12. 27. 제정, 이하 같다) 제53조의 대통령긴급조치권에 기하여 1974. 1. 8. 선포된 대통령긴급조치 제2호에 의하여 설치된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재판한 것이므로, 다른 사정이 없는 한 이 사건 각 재심대상판결을 한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이 사건 재심청구사건을 관할한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먼저 비상보통군법회의의 존속 여부에 관하여 본다.
나. 비상보통군법회의의 존속 여부 - 대통령긴급조치 제2호의 효력 여부
구 헌법 제53조의 대통령긴급조치권에 기하여 1974. 1. 8.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반대·왜곡 또는 비방하거나 그 개정·폐지를 주장·발의·제안·청원하는 행위, 유언비어를 날조·유포하는 행위의 금지 등을 그 주요골자로 하는 대통령긴급조치 제1호 및 대통령긴급조치에 위반하는 자를 심판하기 위하여 비상보통군법회의와 비상고등군법회의를 설치하는 내용의 대통령긴급조치 제2호가 선포되고 이어서 같은 해 4. 3. 민청학련 및 그 관련 단체를 규제하고 학교 내외에서의 학생의 집회·시위·성토·농성 기타의 개별적·집단적 행위와 정당한 이유 없는 출석·수업·시험의 거부 등을 금지하며 대통령긴급조치에 위반한 학생 및 그 소속 학교에 대한 문교부장관의 권한 등을 정하는 것을 그 주요내용으로 하는 대통령긴급조치 제4호가 선포·시행되었다가, 그 후 같은 해 8. 23. 대통령긴급조치 제5호에 의하여 대통령긴급조치 제1호와 제4호가 해제되었는데 제5호 2.에는 “해제 당시 대통령긴급조치 제1호 또는 동 제4호에 규정된 죄를 범하여 그 사건이 재판 계속 중에 있거나 처벌을 받은 자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아니한다.”는 유보규정을 두었으며, 구 헌법에 의하여 선포된 대통령긴급조치 제1호와 제4호는 제5호에 의하여(단 유보규정이 있음은 앞서 본 바와 같다), 제3호는 제6호에 의하여, 제7호는 제8호에 의하여, 제9호는 대통령공고 제67호에 의하여 모두 해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대통령긴급조치 제2호에 대하여는 아무런 조치를 취한 바가 없어 형식상으로는 대통령긴급조치 제2호와, 제1호 및 제4호(제5호에 의하여 그 해제가 유보된 자에 한하여)는 유효하게 존속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구 헌법 제53조는 그 제1항에 “대통령은 천재지변 또는 중대한 재정경제상의 위기에 처하거나 국가의 안전보장 또는 공공의 안녕질서가 중대한 위협을 받거나 받을 우려가 있어 신속한 조치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할 때에는 내정·외교·국방·경제·재정·사법 등 국정전반에 걸쳐 필요한 긴급조치를 할 수 있다.”, 그 제2항에 “대통령은 제1항의 경우에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이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하는 긴급조치를 할 수 있고 정부나 법원의 권한에 관하여 긴급조치를 할 수 있다.”, 그 제3항에 “ 제1항과 제2항의 긴급조치를 한 때에는 대통령은 지체없이 국회에 통고하여야 한다.”, 그 제4항에 “ 제1항과 제2항의 긴급조치는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아니한다.”, 그 제5항에 “긴급조치의 원인이 소멸한 때에는 대통령은 지체없이 이를 해제하여야 한다.”, 그 제6항에 “국회는 재적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긴급조치의 해제를 대통령에게 건의할 수 있으며 대통령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이에 응하여야 한다.”고 규정하여 대통령에게 긴급조치에 관한 권한을 부여하였으며, 이에 의하여 선포된 대통령긴급조치 제1호 내지 제9호는 비록 그 해제에 관한 특별한 조치가 없는 대통령긴급조치 제1, 2, 4호라고 하더라도 그 근거법인 구 헌법 제53조가 1980. 10. 27. 제5공화국 헌법의 제정·공포에 따라 폐지됨으로써 일단 실효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제5공화국 헌법 부칙 제9조는 “이 헌법 시행 당시의 법령과 조약은 이 헌법에 위배되지 아니하는 한 그 효력을 지속한다.”고 규정하여 그 계속효 또는 잠정효를 선언하고 있는바, 제5공화국 헌법 제51조에는 구 헌법 제53조와 같은 국가긴급권에 관하여 그 제1항은 “대통령은 천재지변 또는 중대한 재정경제상의 위기에 처하거나 국가의 안전을 위협하는 교전상태나 그에 준하는 중대한 비상사태에 처하여 국가를 보위하기 위하여 급속한 조치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할 때에는 내정·외교·국방·경제·재정·사법 등 국정전반에 걸쳐 필요한 비상조치를 할 수 있다.”, 그 제2항은 “대통령은 제1항의 경우에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할 수 있고 정부나 법원의 권한에 관하여 특별한 조치를 할 수 있다.”, 그 제3항은 “ 제1항과 제2항의 조치를 한 때에는 대통령은 지체없이 국회에 통고하여 승인을 얻어야 하며 승인을 얻지 못한 때에는 그 때부터 그 조치는 효력을 상실한다.”, 그 제4항은 “ 제1항과 제2항의 조치는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최단기간 내에 한정되어야 하고 그 원인이 소멸한 때에는 대통령은 지체없이 이를 해제하여야 한다.”, 그 제5항은 “국회가 재적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비상조치의 해제를 요구한 때에는 대통령은 이를 해제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구 헌법 제53조의 긴급조치권이나 제5공화국 헌법 제51조의 비상조치권이 모두 소위 국가긴급권에 연유하는 것으로 국가긴급권은 입헌적 법치주의 기구와 수단으로서는 도저히 대처할 수 없는 국가적 위기에 대처하는 예외적 수단을 입헌주의적·합법적 체계에 제도적으로 마련하여 헌법질서의 파괴를 합법적 수단에 의하여 예방하고 국가비상시에 있어서의 합법적인 독재적 권력의 행사를 허용하는 반면 여러가지 규정을 두어 그 남용을 예방하자는 데 그 뜻이 있다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구 헌법 제53조의 대통령긴급조치권과 제5공화국 헌법 제51조의 대통령비상조치권은 그 역사적 연혁이나 그 헌법적 성질에 있어서는 다를 바가 없다고 하겠다.
그러나 구 헌법 제53조와 제5공화국 헌법 제51조는 그 규정상 현저한 차이가 있다. 우선 국가긴급권에서 두드러지게 논의되는 소위 사전예방적 조치가 구 헌법 제53조 제1항에 규정되어 있는 데 비해 제5공화국 헌법 제51조는 이와 같은 사전예방적 조치를 배제하고 있고, 구 헌법 제53조의 긴급조치에 대하여서는 입법부의 사후통제기능이 극히 미약하여 거의 실효를 기대할 수 없는 형식적인 규정이 있을 뿐인 반면 제5공화국 헌법 제51조는 비상조치에 대한 국회의 강력한 통제기능을 규정하고 있음이 그 명문상 명백하다.
그러므로 구 헌법 제53조의 대통령긴급조치권이나 제5공화국 헌법 제51조의 대통령비상조치권은 다같이 그 연혁이나 성질에 있어 강학상의 국가긴급권에 연유하는 것이기는 하나, 각각 그 정하는 바 발동요건이나 통제기능에 있어 구 헌법 제53조의 대통령긴급조치권은 제5공화국 헌법 제51조의 대통령비상조치권과는 현저한 차이가 있어 그 헌법정신에 위배됨이 명백하여 그 계속효가 부인될 수밖에 없어 제5공화국 헌법 제51조의 규정은 대통령긴급조치 제1호, 제2호 및 제4호의 법적 근거가 될 수 없으므로 이 점에 있어서도 대통령긴급조치 각 호는 제5공화국 헌법의 공포와 더불어 실효되었다고 함이 마땅할 것이다( 대법원 1985. 1. 29. 선고 74도3501 판결 참조).
따라서 비상보통군법회의는 그 설치의 근거 법령인 대통령긴급조치 제2호의 실효에 따라 소멸되었으므로 이 사건 재심청구사건의 재판권이 없다고 할 것이고, 그렇다면 그 재판권은 현행 헌법 제101조, 제110조에 따라 형사재판에 대한 재판권을 갖는 일반 법원 또는 군사법원 중 어느 하나에 속한다고 할 것이다.
다. 재판권의 귀속 - 일반 법원의 재판권 여부
그런데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대통령긴급조치 제2호가 그 폐지조치 없이 자동실효된 까닭에 경과조치가 없어 그에 상응하는 관할법원을 정한 명확한 규정이 없다.
그러므로 살피건대, 현행 헌법 제27조 제2항은 “군인 또는 군무원이 아닌 국민은 대한민국의 영역 안에서는 중대한 군사상 기밀·초병·초소·유독음식물공급·포로·군용물에 관한 죄 중 법률이 정한 경우와 비상계엄이 선포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군사법원의 재판을 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고, 군사법원법 제2조 제1항에 의하면, 군형법 제1조 제1항 내지 제4항에 규정된 자, 즉 대한민국 군인, 군무원, 군적을 가진 군의 학교의 학생·생도와 사관후보생·부사관후보생, 병역법 제57조의 규정에 의한 군적을 가지는 재영 중인 학생, 소집되어 실역에 복무 중인 예비역·보충역, 제2국민역인 군인 및 군형법 제1조 제4항 각 호에 규정된 죄를 범한 내외국인은 군법 피적용자로서 군사법원이 그 재판권을 가지며, 한편 군사법원법 제3조 제1항, 계엄법 제10조 제1항은 계엄법 제10조 제1항 각 호의 죄 또는 계엄법 제14조의 죄를 범한 자를 군사법원에서 재판할 것을 정하고 있다.
이와 같은 규정을 모아볼 때 피고인들은 대통령긴급조치 제2호에 의하여 국방부에 설치된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그 긴급조치와 구 군법회의법(1987. 12. 4. 법률 제3993호 군사법원법으로 전문 개정되기 전의 것)이 정하는 바에 따라 재판을 받았을 뿐, 앞에서 설시한 바와 같이 대통령긴급조치 제1호, 제2호 및 제4호가 실효된 이상 군법피적용자가 아니며 현재 우리나라가 비상계엄하에 있지 아니함은 이 법원에 현저한 사실일 뿐더러, 재심대상사건에서의 피고인들에 대한 공소사실이 위 군형법 및 계엄법이 열거한 어느 죄에도 해당되지 않음이 명백하여, 이 사건 재심청구사건의 재판관할권은 헌법이 정하는 바에 따라 일반 법원에 있다고 할 것이다( 대법원 1985. 1. 29. 선고 74도3501 판결 참조).
라. 이 법원의 관할 여부
이 사건 재심청구사건의 재판권이 일반 법원에 있는 이상 그 관할은 일반 관할 규정에 따라 정하여진다고 할 것이다.
토지관할에 관하여는, 형사소송법에서 토지관할은 범죄지 등으로 하고( 같은 법 제4조 제1항 참조) 수인이 공동으로 범한 죄인 경우에는 토지관할을 달리하더라도 1개의 사건에 관하여 관할권 있는 법원은 다른 사건까지 관할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고( 같은 법 제11조 제2호, 제5조 참조), 사물관할에 관하여는, 법원조직법에서 법정형이 사형·무기 또는 단기 1년 이상의 징역 또는 금고에 해당하는 사건 등은 원칙적으로 지방법원(또는 그 지원)의 합의부가 그 제1심으로 심판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같은 법 제32조 제1항 제3호 참조).
먼저, 토지관할에 관하여 보건대, 피고인 1, 3, 4, 5, 6, 7, 8에 대하여는 형사소송법 제4조 제1항에 의하여, 그 공소제기된 범죄지 중 하나인 “서울특별시 종로구”(전자의 재심대상판결 중 피고인 3 31쪽, 피고인 7 38쪽, 피고인 4 58쪽, 피고인 5 71쪽, 피고인 6 89쪽, 피고인 1 95쪽 등, 후자의 재심대상판결 중 피고인 8 59쪽 등) 등을 관할로 하는 서울중앙지방법원에, 피고인 2에 대하여는 피고인 4, 8 등과 대통령긴급조치 위반죄 등을 공동으로 범하였다고 공소제기되었으므로 역시 서울중앙지방법원에, 각각 이 사건 재심청구사건의 토지관할이 인정된다.
다음, 사물관할에 관하여 보건대, 피고인들에 대하여 공소제기된 죄 중 하나인 국가보안법 위반죄는 구 국가보안법(1980. 12. 31. 법률 제3318호로 전문개정되기 전의 것) 제1조 제2호에 해당하는 죄로 그 법정형이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이므로 지방법원 합의부가 그 제1심으로 심판하여야 한다.
결국 이 사건 재심청구사건은 서울중앙지방법원 합의부에 관할이 있다고 할 것이다.
4. 재심사유에 대한 판단
가. 관련 규정
형사소송법 제420조 제7호는 “원판결, 전심판결 또는 그 판결의 기초된 조사에 관여한 법관, 공소의 제기 또는 그 공소의 기초된 수사에 관여한 검사나 사법경찰관이 그 직무에 관한 죄를 범한 것이 확정판결에 의하여 증명된 때”를 재심사유의 하나로 규정하고 있고, 같은 법 제422조는 “ 전 2조의 규정에 의하여 확정판결로써 범죄가 증명됨을 재심청구의 이유로 할 경우에 그 확정판결을 얻을 수 없는 때에는 그 사실을 증명하여 재심을 청구할 수 있다. 단,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확정판결을 얻을 수 없는 때에는 예외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여기서 “확정판결을 얻을 수 없는 때”라 함은 유죄판결을 할 수 없는 사실상, 법률상의 장애가 있는 경우를 의미한다고 할 것이다.
나. 사실인정
의문사위 기록[특히 그 중 아래에서 언급하는 진술인들에 대한 진술조서, 신분장(59권)], 재심대상사건 기록 및 약사 공소외 2 작성의 진술서의 기재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사실이 인정된다.
(1) 의문사위의 조사과정 및 결정 내용
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의문의 죽음으로서 그 사인이 밝혀지지 아니하고 위법한 공권력의 직·간접적인 행사로 인하여 사망하였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사유가 있는 죽음을 당한 사건에 대한 진상을 규명하기 위하여 2000. 1. 15. 법률 제6170호로 제정된 “의문사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근거하여 대통령 소속하에 설치된 의문사위는, 위 법에 따라, 그 위원을 일정한 경력자 중에서 국회의 동의를 받아 대통령이 임명하고( 제5조 제2항) 직무독립성과 신분을 보장받으며( 제9조) 조사과정에서 자료 등의 제출 요구를 받은 기관 등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이에 응하여야 하고 출석요구를 받고도 정당한 이유 없이 출석하지 아니하는 자에 대하여는 동행명령장을 발부할 수도 있으며( 제22조) 조사 결과에 따라 검찰총장에의 고발 또는 수사기관에의 수사요청 등을 할 수 있는( 제25조) 기관이다.
의문사위는, 1974. 9. 4.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74비보군형공 제63호 판결로 인혁당재건위 및 민청학련의 관계자인 공소외 3을 은닉하여 주었다는 등의 대통령긴급조치위반죄 등으로 징역 5년 및 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아 그 피고인의 항소가 기각되고 1975. 7. 22. 대법원에서 74도3503 판결로 그 피고인의 상고가 기각됨으로써 위 판결이 확정되어 수형생활을 하던 중 1975. 10. 15. 사망한 공소외 1에 대하여, 2001. 3. 17.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위법한 공권력의 직·간접적 행사로 인하여 사망하였다고 인정할 만한 상당한 근거가 있고 그 내용이 중대하다고 인정되므로 직권으로 조사를 개시하기로 하는 결정을 하여, 현직 검사가 파견되어 조사에 관한 전반적인 지휘·감독을 하면서 1년 여에 걸쳐 국방부 검찰단, 서울구치소, 정부기록보존소 등으로부터 재심대상판결과 관련된 각종 기록을 수집하고, 수사관과 각 재심대상판결의 일부 생존 공동피고인들과의 대질조사 등을 포함하여 100여 명에 대한 참고인 조사를 한 후, 2002. 9. 16. “ 공소외 1은 민주화운동과 관련하여 위법한 공권력의 직·간접적인 행사로 사망하였다.”고 인정하면서, 소위 “인혁당재건위 사건”에 관하여는, “중앙정보부에서 피고인들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고문을 하고 증거가 조작되었다는 등의 이유로 인혁당재건위 사건의 수사·재판·사형집행은 위법한 것이어서, 결국 인혁당재건위 사건은 고문에 의하여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것에 대하여는 진상을 규명하였으나, 전격적인 사형집행이 이루어진 이유, 수사단계에서 사체 처리까지 지시가 내려지고 집행이 이루어진 구조 등에 대하여는 정확하게 진상을 규명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인혁당재건위 사건에 관하여 재조사할 것을 정부에 권고한다.”는 등의 내용의 결정을 하였다.
(2) 관련자들의 진술 내용
의문사위의 조사과정에서, ① 당시 인혁당재건위 사건의 수사는 중앙정보부 6국에서 근무한 공소외 4가 지휘하여 중앙정보부 수사관들과 경상북도경찰국 등에서 파견된 경찰관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는데, 위 수사에 관여한 수사관 중 서울 영등포경찰서에서 파견된 공소외 5, 서울특별시경찰국에서 파견된 공소외 6 경상북도경찰국에서 파견된 공소외 7, 공소외 8, 국방부 검찰단의 검찰서기 공소외 9, 공소외 10 등은, 당시 중앙정보부에는 고문을 하는 팀이 따로 있었고, 인혁당재건위 사건 수사과정에서 중앙정보부 6국 지하 보일러실에서 고문하는 것을 목격하였으며, 피고인 4, 8, 그리고 이들과 함께 기소되었던 공소외 11, 공소외 12 등 많은 사람들이 고문을 당하였다거나, 대체로 고문을 당하였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등으로 진술하였고, ② 피고인들이 미결수용되었던 서울구치소의 교도관인 공소외 13, 공소외 14, 공소외 15, 공소외 16, 공소외 17 등도 피고인 4가 고문을 당하여 탈장이 되었고 물고문에 의한 폐농양증이 있었으며, 피고인 6은 맥이 풀려 있었고, 피고인들이 조사를 받고 온 후에는 업혀서 들어 왔으며 피멍 자국이 여기 저기 보였고, 당시 긴급조치위반자들은 대부분 고문을 받았으며, 피고인들로부터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고문을 당하였다는 말을 들었다고 진술하였고, ③ 전자의 재심대상판결의 공동피고인인 공소외 18, 공소외 19, 공소외 20, 공소외 21, 공소외 22, 공소외 23, 공소외 24 및 후자의 재심대상판결의 공동피고인인 공소외 25, 공소외 26, 공소외 27, 공소외 28, 공소외 29는, 자신들이 조사를 받을 당시에도 서울 남산에 있는 중앙정보부 6국 지하 보일러실 등지에서 중앙정보부 소속의 공소외 4 등 수사관 및 경상북도경찰국에서 파견된 공소외 30 등 수사관들로부터 몽둥이(야전침대봉) 등으로 구타를 당하고 물고문, 전기고문 등을 당하였다고 하면서 그 고문방법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자세하게 진술하였으며, 조사과정이나 구치소에서 피고인들로부터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고문을 당하였다는 말을 들었고 고문을 당한 듯 많이 아파 보였다는 등으로 진술하였고, ④ 피고인들의 가족인 재심청구인 4, 7 등 및 당시 피고인들의 변호인이었던 함정호, 한승헌, 박승서 변호사 등도 당시 피고인들로부터 수사과정에서 수사관들로부터 고문을 당하였다는 말을 들었고, 이 사건 이후 피고인들의 가족 등이 구명운동 등을 하는 과정에서 그 가족 등도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였다고 진술하였다.
(3) 피고인들의 진술 번복 경위
대통령긴급조치 제1호 5.에는 “이 조치에 위반한 자와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며(이하 생략)”라고 규정하고 있고, 대통령긴급조치 제4호 9.에는 “이 조치에 위반한 자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며(이하 생략)”라고 규정하고 있으며, 대통령긴급조치 제2호 11.에는 “이 긴급조치에 정하지 않은 사항은 군법회의법을 준용한다. (중략) 다만, 군법회의법 제132조, 제238조, 제239조 및 제241조의 규정은 준용하지 아니하며 구속기간의 제한을 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고, 그 12.에는 “비상군법회의 관할사건에 관하여 체포, 구속, 압수 또는 수색을 함에 있어서 관할관의 영장이 필요한 경우에는 검찰관이 이를 발부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피고인들에 대한 범죄사실에는 대통령긴급조치 제1호 및 제4호 위반사실도 포함되어 있는데, 피고인들은 1974. 4. 20.부터 같은 해 5. 2. 사이에 검찰관에 의하여 발부된 구속영장에 의하여 구속되었으나(피고인 5, 6 : 같은 해 4. 20., 피고인 3, 7, 8 : 같은 달 25., 피고인 4 : 같은 해 5. 1., 피고인 1, 2 : 같은 달 2일, 재심대상사건 기록 13-1권 169~205쪽, 36-2권 568쪽), 피고인 2는 위 구속일자보다 앞선 같은 해 4. 30. 서울구치소에 입소하였고(의문사위 기록 59권 229쪽), 피고인들이 수사기관에서 최초 진술서를 작성한 일자(피고인 5 : 같은 해 4. 18., 피고인 6, 8 : 같은 달 19., 피고인 3, 7 : 같은 달 20., 피고인 4 : 같은 달 29., 피고인 2 : 같은 달 30., 피고인 1 : 같은 해 5. 2.)는 피고인 1을 제외하고는 모두 검찰관이 발부한 구속영장에 의하여 구속된 일자보다 앞선 점, 피고인들에 대한 범죄사실이 중대범죄인 점에 비추어 불구속 상태에서 조사를 하였을 가능성도 적어 보이는 점,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대통령긴급조치위반죄에 대하여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등이 가능한 점 등에 비추어 보면, 피고인들은 검찰관이 발부한 구속영장에 의한 구속일자 이전(적어도 최초 진술서를 작성한 일자 또는 그 이전)에 체포, 구금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피고인들이 수사기관에서 작성한 각 진술서, 경찰 및 검찰 작성 각 피의자신문조서에 의하면, 피고인들은 대체로 처음에는 범죄사실을 대부분 부인하다가(다만, 같은 해 4. 29. 처음 피의자신문을 받은 피고인 4, 같은 달 30. 처음 피의자신문을 받은 피고인 2, 같은 해 5. 5. 처음 피의자신문을 받은 피고인 1은 최초 피의자신문시부터 범죄사실 중 상당 부분을 자백하였다), 진술서 작성 및 피의자신문이 반복되면서 범죄사실 중 일정 부분을 자백하기도 하였으나 같은 해 4. 26.경 이전까지는 범죄사실, 특히 공산주의나 북괴와의 관련성에 대하여는 부인하였는데, 같은 달 말경 또는 같은 해 5. 초경부터 중앙정보부 등에서 신문을 받을 무렵에는 공산비밀지하조직의 구성, 구성원, 구체적인 역할분담 및 북괴에의 동조 등 북괴와의 관련성에 대한 부분을 비롯한 범죄사실의 대부분을 자백하였고[ 피고인 1이 최초로 인혁당 활동 및 인혁당 재건을 위한 지하조직 구성 등에 관한 진술, 북한과 영합하여 사회주의 통일정부 건설이 목표라는 등의 진술을 한 같은 해 5. 12.자 진술서(재심대상사건 기록 13-4권 76-62쪽 이하)는 그 글씨체가 기존과는 달리 매우 흔들린 상태이다], 기소된 이후인 같은 해 6. 초경에는 모든 피고인들이 진술조서 형식으로 경북지도부, 서울지도부라는 명칭과 세부적인 사항까지도 모두 자백하였다.
(4) 피고인들에 대한 신분장 등에 기재된 처방 등 내용
피고인 6은 가슴, 배 부위에 흉터가 있고, 피고인 4는 얼굴, 목, 배 부위에 다친 자리가 있으며, 피고인 2는 배 부위에 다친 자리가 있고, 특히 서울구치소에서 피고인 4는 1974. 6. 3. 탈장 증세로 처방받고(의문사위 기록 59권 228쪽), 피고인 2는 같은 해 5. 2. 스스로 왼쪽 손목을 유리로 그어 3㎝ 가량의 상처를 냈으나 담당근무자가 발견하여 의무과에서 응급치료를 받았으며(의문사위 기록 59권 233쪽), 피고인 1은 같은 달 6. 와허증(하지부정) 증세로 처방받고(재심대상사건에 대한 상고심에서 그의 변호인이 처방전을 제출하였다, 재심대상사건 기록 36-1권 2534쪽), 피고인 5, 7, 6은 모두 같은 날 진통제 등을 처방받은 것(의문사위 기록 59권 42, 73, 192쪽)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피고인들은 같은 해 4. 30.경부터 같은 해 6.경까지 사이에 서울구치소에서 포도당수액제, 진통제, 항생제 등을 처방받았다.
다. 판 단
(1) 위와 같이 의문사위의 조사에서, 피고인들이 미결수용되었던 구치소의 교도관, 함께 기소되어 재판받았던 다른 공동피고인들, 피고인들의 가족 및 변호인 등이 수사과정에서 가혹행위가 있었다는 사실을 진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특히 당시 피고인들을 수사하였던 일부 수사관들조차도 피고인들에 대한 수사과정에서 수사관들에 의한 고문 등 가혹행위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있는데, 위와 같은 진술들은 그 직무의 독립성 및 신분을 보장받고 국회의 동의를 받아 대통령이 임명한 위원들로 구성되고 현직 검사가 파견되어 조사를 행한 의문사위의 조사과정에서 이루어진 점, 또한 이 사건과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구치소의 일부 교도관들도 위와 같은 진술을 하고 있고, 일부 수사관들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사실임에도 위와 같은 진술을 하고 있는 점, 대부분의 피고인들이 조사받았던 시기 즈음에 서울구치소에서 항생제, 진통제 등을 처방받았던 사실도 위와 같은 진술들을 뒷받침하고 있는 점 등에 비추어 보면, 그 진술의 신빙성이 매우 높다고 할 것이다.
또한, 피고인들의 수사기관에서의 진술 외에는 피고인들에 대한 범죄사실을 직접적으로 입증하는 증거가 없는 것으로 보이는바, 피고인들은 수사기관에서 법률상 구속기간의 제한 없이 장기간 구금된 상태에서, 대체로 범죄사실, 특히 북괴와 관련된 부분에 대하여는 부인하다가 1974. 4.말경부터 범죄사실의 대부분을 자백하기 시작하고 같은 해 5. 초순 및 중순 중앙정보부에서 신문을 받을 당시에는 공산비밀지하조직의 구성, 구체적인 역할 분담 및 북괴에의 동조 등 범죄사실을 대체로 자백하였으며, 같은 달 중순 및 하순경에는 일부 피고인들은 경북지도부, 서울지도부라는 명칭 및 그 구체적인 조직구성에 대하여도 자백하였고, 기소 이후인 같은 해 6. 초경 작성된 진술조서에 의하면 모든 피고인들이 모든 범죄사실을 자백하였는데, ① 피고인들이 중요한 부분에 관하여 자백하기 시작한 시기에 특별히 중요한 증거가 발견되었다거나 종전 진술을 번복하여 자백할 만한 별다른 사정이 보이지 않는 점, ② 위와 같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백의 내용이 점차로 늘어나고 구체화되었는데, 피고인들은 대체로 비슷한 시기에는 비슷한 내용의 자백을 하는 등 그 자백의 내용과 시기가 대체로 일치하는 점, ③ 그 자백의 시기가 위와 같이 피고인들이 서울구치소에서 진통제, 항생제 등을 처방받은 시기와 근접한 점 등에 비추어 보면, 수사관의 가혹행위 이외에 달리 피고인들이 진술을 번복하여 범죄사실을 자백할 만한 계기나 사정을 찾아볼 수 없다.
(2) 이러한 사정들을 종합하여 보면, 피고인들은 이 사건으로 조사를 받기 시작한 1974. 4.경부터 공소가 제기된 같은 해 5. 27.을 지나 또 다시 진술조서를 받은 같은 해 6. 초순경까지 사이에 서울 남산 소재 중앙정보부 6국 지하 보일러실 등지에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중앙정보부 소속 수사관과 파견 경찰관들로부터 몽둥이(야전침대봉) 등으로 구타를 당하고 물고문, 전기고문 등을 받는 등 폭행 및 가혹행위를 당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고, 따라서 각 재심대상판결의 공소의 기초가 된 수사에 관여한 수사관이 그 직무에 관하여 형법 제125조 소정의 독직폭행죄를 범한 사실이 증명되었다고 할 것이다.
(3) 그런데 피고인들이 수사기관에서 조사를 받은 것은 1974.이고 이 사건 수사관들의 피고인들에 대한 독직폭행죄는 그 법정형이 “5년 이하의 징역과 10년 이하의 자격정지”이므로 이미 형사소송법 제249조 제1항 제4호에서 정한 5년의 공소시효가 완성되었다고 할 것이어서, 같은 법 제422조 소정의 “확정판결을 얻을 수 없는 때”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고, 수사관들이 피고인들에게 고문 등 가혹행위를 함으로써 직무상 범죄를 저질렀음이 증명되었다고 할 것이므로, 같은 법 제420조 제7호에서 정한 재심사유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5. 결 론
따라서 이 사건 재심청구는 이유 있으므로, 형사소송법 제435조 제1항에 의하여 각 재심대상판결에 대하여 재심을 개시하기로 하여 주문과 같이 결정한다.
판사 이기택(재판장) 강지현 곽윤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