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란실행·국방경비법위반] 확정[각공2019상,300]
【판시사항】
‘제주4·3사건’ 당시 내란실행 또는 구 국방경비법 위반의 죄목으로 군법회의의 재판을 받고 군·경에 의하여 제주도 내 수용시설 등에 구금되었다가 육지에 있는 교도소로 이송된 후 일정 기간 수형인의 신분으로 구금되었던 피고인들이 재심대상판결에 대해 재심을 청구하여 재심이 개시된 사안에서, 피고인들이 당시 구체적으로 어떠한 공소사실로 군법회의에 이르게 된 것인지 확인할 만한 자료가 없어 공소사실이 특정되지 아니한 점, 당시 피고인들에 대하여 구 국방경비법에서 정한 기소사실의 통고 절차가 이루어지지 아니하였던 점 등을 종합하면, 피고인들에 대한 공소는 각 ‘공소제기의 절차가 법률의 규정에 위반하여 무효인 때’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공소를 모두 기각한 사례
【판결요지】
‘제주4·3사건’ 당시 내란실행 또는 구 국방경비법(1948. 7. 5. 남조선과도정부 법률로 제정되어 1948. 8. 4.부터 시행되고 1962. 1. 20. 군법회의법 제1004호로 폐지된 것, 이하 같다) 위반의 죄목으로 군법회의의 재판을 받고 군·경에 의하여 제주도 내 수용시설 등에 구금되었다가 육지에 있는 교도소로 이송된 후 일정 기간 수형인의 신분으로 구금되었던 피고인들이 재심대상판결에 대해 재심을 청구하여 재심이 개시된 사안이다.
피고인들의 이름과 당시 나이, 직업, 본적지, 항변 및 판정(판정), 언도(언도)일자, 형량 및 수감교도소가 대상자별로 각 하나의 열(렬)로 기재되어 있는 수형인명부를 비롯하여 일부 피고인들에 대한 군집행지휘서나 감형장 등의 수형(수형) 관련 문서 등에도 해당 피고인들의 죄명과 적용법조만 기재되어 있을 뿐 달리 공소장이나 소송기록 내지 판결문 등 피고인들이 당시 구체적으로 어떠한 공소사실로 군법회의에 이르게 된 것인지 확인할 만한 자료가 없고, 검사에 의하여 복원된 피고인들에 대한 공소사실은 실질적으로 구 형법[1948. 3. 20. 군정법령 제176호로 개정되어 1948. 4. 1. 시행된 조선형사령에 의해 의용된 일본 형법(1941년 법 제61호)을 말한다] 제77조 제1항 및 구 국방경비법 제32조의 추상적 구성요건들을 그대로 이기한 정도에 불과하거나, 또는 검사가 재심공판 당시를 기준으로 피고인신문 내지 제주4·3사건의 진행 경위나 당시 상황에 관한 각종 자료들을 바탕으로 사후적으로 이를 추단하여 재구성하며 소송절차에서 피고인신문을 통하여 얻은 당시 피고인들에 대한 군·경의 질문 내용 내지 일부 위 구성요건들에 부합하는 듯한 피고인들의 진술 내용 등을 공소사실의 일부로 삽입한 것에 지나지 아니하여 여전히 피고인들이 바로 그와 같은 공소사실로 재심대상판결을 받기에 이른 것이라고 단언하기에 부족하므로 피고인들에 대한 공소사실은 특정되지 아니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점, 나아가 제반 사정에 비추어 당시 피고인들에 대하여 구 국방경비법 제65조에서 정한 ‘예심조사’ 및 같은 법 제66조에서 정한 ‘기소장 등본의 송달’을 통한 기소사실의 통고 절차가 이루어지지 아니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점 등을 종합하면, 피고인들에 대한 공소는 각 ‘공소제기의 절차가 법률의 규정에 위반하여 무효인 때’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공소를 모두 기각한 사례이다.
【참조조문】 구 헌법(1952. 7. 7. 헌법 제2호로 개정되기 전의 것, 제헌헌법) 제64조(현행 제77조 참조), 부칙(1948. 7. 17.) 제100조,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호, 구 형법(1953. 9. 18. 법률 제293호로 형법이 제정되기 전의 것) 제77조 제1항(현행 형법 제87조 참조), 구 국방경비법(1962. 1. 20. 법률 제1004호 군법회의법 부칙 제6조로 폐지) 제32조, 제33조, 제65조, 제66조, 구 군법회의법(1987. 12. 4. 법률 제3993호 군사법원법으로 전부 개정되기 전의 것) 부칙(1962. 1. 20.) 제2조, 제3조, 제4조, 제5조, 제6조 제1호, 군형법 부칙(1962. 1. 20.) 제5조, 구 국군조직법(1963. 5. 20. 법률 제1343호로 전부 개정되기 전의 것) 제20조(현행 삭제), 형사소송법 제327조 제2호, 제420조 제7호, 제422조, 제435조 제1항, 제438조 제1항【전 문】 【피 고 인】 별지 피고인 명단 기재와 같다.
【재심청구인】 피고인들
【검 사】 정광병 외 1인
【변 호 인】 법무법인 해마루 담당변호사 임재성 외 1인
【재심대상판결】 별지 재심대상판결 기재와 같다.
【주 문】
피고인들에 대한 공소를 모두 기각한다.
【이 유】
1. 사건의 진행경과
가. 피고인들은 제주4·3사건(이하 “제주4·3사건”이라 함은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항이 정의한 바에 따라 “1947. 3. 1.을 기점으로 1948. 4. 3.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 9. 21.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이 진행 중이던 1948년 가을경부터 1949. 7.경 사이에 군·경에 의하여 당시 제주도 내에 설치된 수용시설 등에 구금되어 있다가 1948. 12.경 이후 1949. 7.경에 이르기까지 육지에 있는 교도소로 이송되어 이후 각 일정 기간 동안 수형인의 신분으로 교도소에 구금되어 있었던 사람들이다.
나. 피고인들은, 자신들의 이름과 당시 나이, 직업, 본적지, 항변 및 판정(판정), 언도(언도)일자, 형량 및 수감교도소가 대상자별로 각 하나의 열(렬)로 기재되어 있는 “단기 4281년 12월·단기 4282년 7월(군법회의분) 수형인명부”에 터 잡아, 2017. 4. 19. 이 법원에 재심대상판결에 대한 재심을 청구하였다.
다. 이 법원은 2018. 9. 3. “비록 공소장이나 공판기록, 판결문 등 당시 피고인들에 대하여 유죄의 판결이 있었음을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발견되지 아니하였지만, 위 수형인명부에 기재된 내용들 및 피고인들의 진술 내용, 일부 피고인들에 대한 수형 관련 자료와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등의 관련 자료들을 종합하여 보면, 당시 피고인들이 육지로 이송되어 교도소에 구금된 것은 피고인들에게 각 해당 죄목에 따른 법령을 적용하여 수형인명부에 기재되어 있는 각 해당 형벌을 부과하기로 하는 사법기관(군법회의)의 유권적 판단이 그 근거가 되었던 것이라 볼 수밖에 없어, 피고인들에 대하여는 각 별지 재심대상판결 기재와 같은 ‘유죄의 판결’이 있었다고 보아야 하고, 나아가 별지 재심대상판결에는 각 형사소송법 제420조 제7호 및 제422조가 정한 재심 이유 또한 존재한다.”라는 이유를 들어 재심개시의 결정을 하였고, 위 결정은 그 무렵 확정되었다.
2. 피고인들에 대한 공소제기 절차의 적법성에 대한 판단
가. 먼저 피고인들에 대한 공소사실의 특정 여부에 관하여 본다.
(1) 재심 절차는 재심대상판결의 당부를 판단하는 후속 절차가 아니라 피고사건 자체를 처음부터 다시 심판하는 별개의 소송절차인 까닭에, 재심개시의 결정이 확정된 사건에 대하여는 법원은 그 심급에 따라 다시 심판을 하여야 한다(형사소송법 제438조 제1항). 재심대상사건의 기록이 이미 폐기되거나 또는 멸실된 경우 법원으로서는 가능한 노력을 다하여 그 기록을 복구하여 남아 있는 자료들과 새로 수집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피고사건에 관한 판단에 나아가야만 할 것이나, 그와 같은 기록의 복구가 가능한 경우는 물론, 가사 그것이 곤란하거나 불가능한 경우라 하더라도, 현행 형사소송법상 공소사실의 특정 및 그에 대한 입증의 책임은 어디까지나 국가로부터 부여된 소추권을 행사하는 검사에게 있다.
(2) 이 사건의 경우, 앞서 본 수형인명부에는 별지 재심대상판결 제1항 기재 피고인들의 죄목으로 “죄과: 형법 제77조 위반, 범죄사실: 내란죄”, 별지 재심대상판결 제2항 기재 피고인들의 죄목으로 “죄과: 국방경비법 제32조, 제33조 위반, 범죄사실: 적에 대한 구원통신연락급간첩죄”만이 기재되어 있고, 그 밖에 일부 피고인들에 대한 군집행지휘서나 감형장 등의 수형(수형) 관련 문서 등에도 해당 피고인들의 죄명과 적용법조만이 기재되어 있을 뿐, 달리 공소장이나 소송기록 내지 판결문 등 피고인들이 당시 구체적으로 어떠한 공소사실로 군법회의에 이르게 된 것인지를 확인할 만한 자료가 없다.
검사는 제1회 공판기일에 과거 피고인들에게 적용된 구 형법[1948. 3. 20. 군정법령 제176호로 개정되어 1948. 4. 1. 시행된 조선형사령에 의해 의용된 일본 형법(1941년 법 제61호)을 말한다. 이하 같다] 제77조 제1항[“정부를 전복하거나 국토를 참절하거나 기타 조헌(조헌)을 문란하게 할 목적으로 하여 폭동을 한 자는 내란의 죄로 하여 좌의 구별에 따라서 처단한다.”] 및 구 국방경비법(1948. 7. 5. 남조선과도정부 법률로 제정되어 1948. 8. 4.부터 시행되고 1962. 1. 20. 군법회의법 제1004호로 폐지된 것, 이하 같다) 제32조(“직접, 간접으로 무기, 탄약, 양식, 금전, 기타 물자로서 적을 구원 혹은 구원을 기도하거나 또는 고의로 적을 은닉 혹은 보호하거나 또는 적과 통신 연락 혹은 적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여하한 자든지 군법회의 판결에 의하여 사형 또는 타 형벌에 처함”), 제33조(“조선경비대의 여하한 요새지, 주둔지, 숙사 혹은 진영 내에서 간첩으로서 잠복 또는 행동하는 여하한 자든지 고등군법회의에서 차를 재판하며, 유죄 시에는 사형에 처함”)의 각 구성요건에 기초하여, 별지 재심대상판결 제1항 기재 피고인들에 대하여는 “위 피고인들은 1948. 4.경부터 같은 해 11월경 사이에 제주도 일원에서 불상자들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거나 국토를 참절하거나 기타 조헌(조헌)을 문란하게 할 목적으로 폭동하였다.”, 그리고 별지 재심대상판결 제2항 기재 피고인들에 대하여는 “위 피고인들은 1948. 4.경부터 1949. 6.경 사이에 제주도 일원에서 무기, 탄약, 양식, 금전, 기타 물자로서 적을 구원 혹은 구원을 기도하거나 또는 고의로 적을 은닉 혹은 보호하거나 또는 적과 통신 연락 혹은 적에게 정보를 제공하였거나, 대한민국 군대의 요새지, 주둔지, 숙사 혹은 진영 내에서 간첩으로서 잠복 또는 행동하였다.”라고 공소사실을 진술한 후, 이후 2018. 12. 11.자 공소장변경 허가신청서를 통하여 피고인들에 대한 공소사실을 일응 별지 ‘공소사실’ 기재와 같이 복원(‘공소장변경’이라 함은 검사가 법원의 허가를 얻어 원래의 공소장에 기재되어 있는 공소사실이나 적용법조를 추가, 철회 또는 변경하는 것을 말하고 그에 의하여 법원의 심판대상 또한 변경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으로서, 이는 어디까지나 “공소사실의 동일성을 해하지 아니하는 한도” 내에서만 허용되는 것인바, 이 사건의 경우와 같이 원래의 공소사실이 아직 복원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공소사실을 “변경”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지 않거니와, 원래의 공소사실이 복원되지 아니하여 검사가 변경하고자 신청한 공소사실과의 동일성 여부를 판단할 기초가 형성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법원의 심판대상을 변경하게 되는 공소장변경은 그 실질에 있어 추가기소 내지는 새로운 공소제기에 해당할 우려가 있어 허용될 수 없고, 다만 검사의 위 공소장변경 허가신청은 피고인들에 대한 공소사실을 그와 같이 복원하는 취지로 선해한다)하여 제출하였다.
(3) 그러나 검사에 의하여 복원된 위 공소사실은, 그럼에도 실질적으로는 구 형법 제77조 제1항 및 구 국방경비법 제32조의 추상적 구성요건들을 그대로 이기한 정도에 불과하거나, 또는 검사가 재심공판 당시를 기준으로 피고인신문 내지 제주4·3사건의 진행 경위나 당시의 상황에 관한 각종 자료들을 바탕으로 사후적으로 이를 추단하여 재구성하며 이 사건 소송절차에서 피고인신문을 통하여 얻은 당시 피고인들에 대한 군·경의 질문 내용 내지 일부 위 구성요건들에 부합하는 듯한 피고인들의 진술 내용 등을 공소사실의 일부로 삽입한 것에 지나지 아니하여 여전히 피고인들이 바로 그와 같은 공소사실로 재심대상판결을 받기에 이른 것이라고 단언하기에는 부족한바, 달리 피고인들이 당시 구체적으로 어떠한 공소사실로 군법회의에 이르게 된 것인지를 확인할 만한 자료가 발견되지 아니한 이상, 피고인들에 대한 공소사실은 특정되지 아니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나. 다음으로 당시 피고인들을 앞서 본 바와 같은 죄목으로 군법회의의 심판에 회부함에 있어 필요한 절차적인 규정이 준수되었는지 여부에 관하여 본다.
(1) 별지 재심대상판결 제2항 기재 피고인들의 경우 수형인명부에 기재된 죄과가 “국방경비법 제32조, 제33조 위반”으로 기재되어 있고, 구 국방경비법은 제2편에서 제6조부터 제50조까지 각종 범죄의 구성요건 및 그에 따른 형벌을 규정한 외에 제3편에서 “군법회의”라는 제목 아래 제51조부터 제101조까지 각 군법회의의 구성과 그 재판권, 기소 및 판결에 이르기까지의 절차, 판결의 집행을 위한 절차 등에 관하여 규정하고 있어, 별지 재심대상판결 제2항 기재 군법회의에 관하여는 구 국방경비법이 그 실체법이자 절차법으로 적용되어야 함은 별다른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와 달리 별지 재심대상판결 제1항 기재 피고인들의 경우에는 수형인명부에 기재된 죄과가 국방경비법 위반이 아니라 “형법 제77조 위반”이고, 다만 1948. 11.경 제주도를 ‘합위지경(합위지경)’으로 하여 선포된 계엄에 의하여 군법회의의 심판을 받게 된 것인 까닭에, 별지 재심대상판결 제1항 기재 군법회의에 관하여 적용되어야 할 절차법은 무엇인지 문제 되나, ① 1948. 11. 30. 법률 제9호로 제정된 국군조직법 제20조는 “국군 현역과 소집을 당한 군인 및 군속은 군사법령의 적용을 받는다. 군인·군속에 대한 심판은 원칙적으로 군법회의에서 행하며 죄와 심판의 수속은 따로 법률로 정한다.”라고 규정하고 있음에도, 그에 따라 “죄와 심판의 수속”에 관한 법률이 그 무렵 따로 마련된 흔적은 발견되지 아니하는바, 이는 당시 그에 해당할 만한 법률이 이미 존재하고 있던 까닭으로 보이는 점, ② 1948. 7. 5. 그 시행일을 1948. 8. 4.로 하여 제정된 구 국방경비법은, 그 정당성의 여부는 논외로 하고, “현행법령은 이 헌법에 저촉되지 아니하는 한 효력을 가진다.”라는 제헌헌법 제100조의 규정을 근거로 별지 재심대상판결 제1항 기재 군법회의가 열린 1948. 12.경 당시에 실제 적용되고 있는 법률이었던 점, ③ 1962. 1. 20. 법률 제1004호로 제정된 군법회의법은 그 부칙에서 “서기 1948년 7월 국방경비법과 서기 1948년 7월 해안경비법 중 군형법 부칙 제5조에 열거된 이외의 법조”를 폐지[1962. 1. 20. 법률 제1003호로 제정된 군형법 부칙 제5조는 “과도정부법률(서기 1948년 7월) 국방경비법 중 제2조, 제6조 내지 제50조, 제88조, 제91조 내지 제93조, 제102조...” 등을 폐지하였다]하며, 경과규정으로 “본법 시행 당시에 군법회의심판에 계속 중인 사건 및 군법회의재판이 확정된 사건에 대하여는 국방경비법과 해안경비법을 적용한다.”, “국방경비법, 해안경비법은 본법 시행 시까지 효력을 가진다.”, “본법 시행 후에 공소를 제기한 사건에 대하여는 본법을 적용한다. 단, 본법 시행 전에 국방경비법, 해안경비법 또는 기타 법률에 의하여 행한 소송행위의 효력에는 영향을 미치지 아니한다.”, “본법 시행 전에 국방경비법과 해안경비법에 의하여 행한 소송절차로서 본법의 규정에 상당하는 것은 본법에 의하여 행한 것으로 간주한다.”라는 규정을 두고 있어, 군법회의법은 절차법적인 면에서 구 국방경비법의 후신(후신)으로 보이는 점, ④ 수형인명부의 기재와 그 첨부 서류 등에 의하더라도 별지 재심대상판결 제1항 기재 군법회의와 같은 제2항 기재 군법회의 사이에 그 설치나 운영, 집행 등의 절차를 달리한 흔적이 보이지 아니하고, 당시 군법회의를 설치·운영함에 있어서 계엄하의 군법회의와 국방경비법 위반에 관한 군법회의에 그 절차를 달리하였어야 하거나 또는 달리하였다고 볼 만한 마땅한 이유가 없는 점 등에 비추어 보면, 별지 재심대상판결 제1항 기재 군법회의에 관하여도 구 국방경비법이 그 절차법으로 적용된다고 봄이 타당하다.
(2) 구 국방경비법에 의하면, ‘군법회의 설치 장관은 피고사건을 접수하는 경우 법규에 의거하여 이를 심판을 위하여 회부하든지 또는 기소(여기에서 말하는 “기소”라 함은 ‘군법회의 설치 장관에 대하여 피고사건을 군법회의의 심판에 회부하여 줄 것을 촉구하는 의사표시’를 의미하는 것으로, 일반 형사소송법에서 말하는 ‘공소의 제기’와는 차이가 있다)를 각하하든지 기타 적절한 조치를 신속히 취하여야’ 하고, 피고사건을 고등군법회의(당시 군법회의는 그 설치 권한에 따라 고등군법회의, 특설군법회의, 약식군법회의의 3종류로 나뉘어 있었고, 단심제로 운영되었다)에 회부하기 위해서는 ‘법무부 장교 중에서 임명된 예심조사관’에 의한 “완전 공평한 예심조사”를 거쳐야만 하며, 예심조사관은 ‘피고인에게 소환 가능한 전 증인을 반대심문할 기회와 피고인 자신을 위한 변호 또는 정상 작량될 여하한 것이라도 요망하면 제시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여야 하며 또한 피고인이 신립하는 증인으로서 소환 가능한 증인을 심문하여야’ 하고, 예심조사관의 조사보고를 받은 군법회의 설치 장관이 소속 법무심사관의 심사를 거쳐 피고사건을 군법회의에 회부한 경우, 군법회의 설치 명령에 의하여 임명된 검찰관은 ‘피고인 또는 불가피한 사유가 유한 경우에는 기 관선변호인에게 심판 예정인 해 기소장의 등본 1통을 송달’하여야 한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 기록에 의하여 인정할 수 있는 아래와 같은 사정들에 비추어 보면, 당시 피고인들에 대하여 구 국방경비법 제65조가 정한 “예심조사” 및 제66조가 정한 “기소장 등본의 송달”을 통한 기소사실의 통고 절차는 이루어지지 아니하였던 것으로 보이고, 달리 위와 같은 절차가 준수되었음을 인정할 만한 아무런 증거가 없다.
① 피고인들은 이 법정에 이르기까지 일관하여 “자신들이 당시 구체적으로 어떠한 범죄사실로 재판을 받았는지 알지 못한다.”라는 취지로 진술하고 있고, 일부 피고인들을 포함하여 당시 군법회의의 판단에 따라 육지로 이송되어 수형인의 신분으로 교도소에 구금된 사람들의 경험에 관한 진술을 담은 채록집이나, 피고인들이 이 사건 재심 청구에 즈음하여 작성한 각 진술서 내지 이 법정에서의 각 진술 어디에도 위와 같은 “예심조사” 내지 “기소장 등본의 송달”에 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으며, 피고인들의 재심 청구 이후 이 법원의 자료 수집 및 사실조사 과정에서도 당시 피고인들에 대하여 예심조사관에 의한 예심조사와 기소장 등본의 송달을 통한 기소사실의 통고가 이루어졌음을 엿볼 수 있을 만한 기록이 발견되지 아니하였다.
② 별지 재심대상판결 제1항 기재 군법회의의 경우 1948. 12. 3.부터 같은 달 27일까지 약 25일 동안에 총 12차례가 열려 당시 재판을 받은 민간인 수가 871명에 달하며, 별지 재심대상판결 제2항 기재 군법회의의 경우 1949. 6. 23.부터 같은 해 7. 7.까지 약 15일 동안에 총 10차례가 열려 당시 재판을 받은 민간인 수가 1,659명에 달한다는 것인바, 이와 함께 1948. 10. 17. 제주도에 소개령이 내려진 이후 피고인들이 각 군·경에 체포된 시기와 각 군법회의의 개최 일자,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2003. 12. 발간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등에 담긴 당시의 정황 등 제반의 사정을 종합하여 보더라도, 위와 같이 단기간에 그와 같이 다수의 사람들을 집단적으로 군법회의에 회부함에 있어 그 개개인에 대하여 예심조사관에 의한 예심조사 및 기소장 등본 송달 절차가 제대로 이루어졌을 것이라 추정하기도 어렵다(당시 피고인들이 아니라 피고인들의 관선변호인에게 기소장 등본이 송달되었을 가능성은 있으나, 구 국방경비법 제66조는 불가피한 사유가 있는 경우에 한하여 관선변호인에게 기소장 등본을 송달할 수 있는 것으로 정하고 있는바, 피고인들은 당시 군·경에 의하여 구금된 상태에 있었던 까닭에 피고인들에게 기소장 등본을 송달하지 못할 불가피한 사유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려우므로, 가사 관선변호인에게 기소장 등본이 송달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를 들어 구 국방경비법 제66조가 정한 기소장 등본 송달 절차가 준수된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③ 제주4·3사건의 진행 경위 및 당시의 상황에 관한 조사 내용들이 담겨 있는 위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도 별지 재심대상판결 제2항 기재 군법회의와 관련하여 ‘군법회의를 담당한 군 당국이 예심과 심리를 했다는 증거가 없어 군법회의 재판절차가 정상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보기 어렵다. 즉, 제주경찰국 특별수사대가 1949. 6. 6.부터 같은 해 8. 3.까지 포로자 및 귀순자 1,021명을 제2연대에 송치하면서 작성한 비밀문건인 “죄수상황보고서”에는 군법회의 대상자들에 대한 처치 등급을 A, B, C, D, 갑, 을 등으로 나누어 기재하였고, 1949. 6. 5. 모슬포경찰서장이 제주경찰국장에게 보낸 비밀문건에는 “기록 A는 사형, B는 무기 의견”이라고 명시하였는데, 그 송치 시기가 1949년 군법회의가 열렸다는 시기와 일치하는 것으로 볼 때, 예심조사 없이 경찰의 의견을 수용하여 판정·판결 내용을 미리 정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3. 결론
그렇다면 피고인들에 대한 공소는 각 그 ‘공소제기의 절차가 법률의 규정에 위반하여 무효인 때’에 해당하므로, 형사소송법 제327조 제2호에 의하여 피고인들에 대한 공소를 모두 기각한다.
판사 제갈창(재판장) 정승진 서영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