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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마크 저장 [형사] 1심합의사건재심

서울중앙지법 2012. 10. 22. 선고 2011재고합14 판결

[국방경비법위반] 확정[각공2012하,1284] 【판시사항】 [1] 재심개시결정이 확정된 사건에 대하여 법원이 심급에 따라 다시 심판하도록 규정한 형사소송법 제438조 제1항에서 ‘다시 심판한다’는 것의 의미 [2] 재심대상사건 기록이 보존기간 만료로 폐기된 경우, 재심심판절차에서 법원이 취해야 할 조치 [3] 피고인이 과거 북파공작 임무수행 중 적에 투항한 후 남파간첩으로 선발되어 지령을 받고 국내에 잠입한 다음 합법을 가장할 의사로 위장자수하였다는 공소사실로 구 국방경비법상 간첩죄가 인정되어 사형이 집행되었는데, 피고인의 유족이 이에 대해 재심을 청구하여 재심이 개시된 사안에서, 당시 수사서류에서 보이는 의문점과 법원의 증인조사 결과 등을 종합할 때 검사가 제출한 증거가 공소사실에 대하여 합리적인 의심을 배제할 정도로 충분한 증명력을 갖춘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한 사례 【판결요지】 [1] 재심개시의 결정이 확정된 사건에 대하여 법원은 심급에 따라 다시 심판을 하여야 하는데( 형사소송법 제438조 제1항), 여기서 ‘다시 심판한다’는 것은 재심대상판결의 당부를 심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 자체를 처음부터 새로 심판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당연히 재심대상판결의 기초가 된 증거와 그 이후에 수집된 증거를 모두 종합하여 판단하여야 한다. [2] 재심대상사건 기록이 보존기간 만료로 이미 폐기되었다고 하더라도 가능한 노력을 다하여 그 기록을 복구하여야 하며, 부득이 기록의 완전한 복구가 불가능한 경우에는 판결서 등 수집한 잔존자료에 의하여 알 수 있는 원판결의 증거들과 재심공판절차에서 새롭게 제출된 증거들의 증거가치를 종합적으로 평가하여 재심대상사건을 새로이 판단하여야 한다. [3] 피고인이 과거 북파공작 임무수행 중 적에 투항한 후 남파간첩으로 선발되어 그 지령을 받고 국내에 잠입한 다음 합법을 가장할 의사로 육군첩보부대에 위장자수하였다는 공소사실로 구 국방경비법(1948. 7. 5. 남조선과도정부 법률로 제정되어 1962. 1. 20. 법률 제1004호로 폐지)상 간첩죄가 인정되어 사형이 집행되었는데, 피고인의 유족이 이에 대해 재심을 청구하여 재심이 개시된 사안에서, 재심대상사건의 재판기록이 이미 폐기되어 존재하지 않으므로 현재로서 수집할 수 있는 최량의 증거인 수사기록 일부, 재심대상사건의 판결서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진실규명결정서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공소사실을 판단하여야 하는데, 당시 수사서류에서 보이는 의문점과 법원의 증인조사 결과 등을 종합할 때 검사가 제출한 증거가 공소사실에 대하여 합리적인 의심을 배제할 정도로 충분한 증명력을 갖춘 것으로 보기 어렵고, 달리 공소사실을 인정할 증거를 찾기 어렵다는 이유로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한 사례. 【참조조문】 [1] 형사소송법 제438조 제1항 / [2] 형사소송법 제438조 / [3] 구 국방경비법(1948. 7. 5. 남조선과도정부 법률로 제정되어 1962. 1. 20. 법률 제1004호로 폐지) 제33조, 형사소송법 제325조 【참조판례】 [2] 대법원 2004. 9. 24. 선고 2004도2154 판결(공2004하, 1781) 【전 문】 【피 고 인】 피고인(사망) 【재심청구인】 피고인의 자 재심청구인 【군검찰관(검사)】 이갑열 외 1인 【변 호 인】 법무법인 지평지성 담당변호사 조용환 외 1인 【재심대상판결】 단기 4292년 3월 23일 특명 갑발 제24호에 의하여 설치된 중앙고등군법회의 1959. 12. 2. 선고 국방경비법위반(간첩) 사건 판결 【주 문】 피고인은 무죄. 【이 유】 1. 이 사건 공소사실의 요지 및 적용법령 가. 공소사실의 주1) 요지 피고인은 북파공작 임무수행 중 적에게 투항하여 1956년 11월 초순경 남한간첩으로 피선되었으며 1957. 9. 1.까지 드바크 설치방법, 연락방법, 공작방법, 사격술 등 실무교육을 받은 뒤, 육군첩보부대 각 주둔위치, 장비, 병력기구 등을 탐지 보고할 것, 정부·정당 요인 등을 살해할 것 등의 지령을 받았다. 지령 내용을 수행할 목적하에 무장대원 2명의 안내를 받아서 의정부 서북방 대봉산에 도착하자 2개의 드바크 장소를 설정하고, 동 무장대원과 상별한 후 계속 남하하여 의정부 후산인 일향봉에서 휴대품 일체를 지하에 매몰하고 평복으로 환의 착용하여 미국화 150불 및 한국은행권 2만 환을 소지하고 의정부를 경유, 1957. 10. 6. 22:00경 서울에 잠입한 후 합법을 가장할 의사로 1957. 10. 8. 육군첩보부대에 위장자수하였다. 나. 적용법령 재심대상판결은 적용법령을 구 국방경비법(1948. 7. 5. 남조선과도정부 법률로 제정되어 1962. 1. 20. 법률 제1004호로 폐지된 것, 이하 ‘국방경비법’이라 한다 주2) ) 제33조로 하여 피고인에게 유죄를 선고하였고, 국방경비법 제33조는 “조선경비대의 여하한 요새지, 주둔지, 숙사 혹은 진영 내에서 간첩으로서 잠복 또는 행동하는 여하한 자든지 고등군법회의에서 차(차)를 재판하며, 유죄 시에는 사형에 처함”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주3) . 2. 판단 가. 이 사건 판단의 자료 및 방법 (1) 재심개시의 결정이 확정된 사건에 대하여는 법원은 그 심급에 따라 다시 심판하여야 하는데( 형사소송법 제438조 제1항), 다시 심판한다는 것의 의미는 재심대상판결의 당부를 심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 자체를 처음부터 새로 심판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당연히 재심대상판결의 기초가 된 증거와 그 이후에 수집된 증거를 모두 종합하여 판단하여야 한다. 그런데 이 사건의 경우 이 법원이 국가기록원 등에 기록의 송부 및 보존 여부 확인을 요청한 결과 그 재판기록은 그 어디에도 보존되어 있지 아니하므로, 이 법원이 재심대상사건을 판단함에 있어 그 재판기록을 검토할 수는 없다. (2) 한편 재심대상사건의 기록이 보존기간의 만료로 이미 폐기되었다고 하더라도 가능한 노력을 다하여 그 기록을 복구하여야 하며, 부득이 기록의 완전한 복구가 불가능한 경우에는 판결서 등 수집한 잔존자료에 의하여 알 수 있는 원판결의 증거들과 재심공판절차에서 새롭게 제출된 증거들의 증거가치를 종합적으로 평가하여 재심대상사건을 새로이 판단하여야 하는데( 대법원 2004. 9. 24. 선고 2004도2154 판결 참조), 재심대상사건의 재판기록이 이미 폐기되어 존재하지 않는 이 사건의 경우에는 지금 단계에서 최대한 확보할 수 있는 자료를 기초로 하여 재심대상사건을 살펴볼 수밖에 없다. (3) 따라서 이 법원은 현재로서 수집할 수 있는 최량의 증거인 수사기록 일부, 재심대상사건의 판결서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진실규명결정서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이 사건 공소사실을 판단하기로 한다. 나. 공소사실에 대한 판단 (1) 법리 형사재판에서 범죄사실의 인정은 법관으로 하여금 합리적인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의 확신을 가지게 하는 증명력을 가진 엄격한 증거에 의하여야 하므로, 검사의 입증이 위와 같은 확신을 가지게 하는 정도에 충분히 이르지 못한 경우에는 비록 피고인의 주장이나 변명이 모순되거나 석연치 않은 면이 있는 등 유죄의 의심이 간다고 하더라도 피고인의 이익으로 판단하여야 한다( 대법원 2011. 4. 28. 선고 2010도14487 판결 등 참조). (2) 검사가 제출한 “간첩 피고인 심문경위” 등에 대한 증명력 판단 검사가 제출한 증거 중 피고인이 북한의 남파간첩으로 활동할 의도로 위장자수를 하였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뒷받침하는 자료로는 ‘간첩 피고인 심문경위 주4) ’가 있으나, 기록에 의하여 인정되는 다음과 같은 사정들에 비추어 보면 위 증거는 이 사건 공소가 제기된 이후 대북공작기밀 비밀유지의 목적하에 허위가 개입되어 작성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려워 그 신빙성에 의문이 있다. ① 피고인은 1957. 10. 8. 육군첩보부대(HID)에 자수한 이후 1959. 4. 24.까지 563일 동안 육군첩보부대에 구속된 상태로 조사를 받았다. ② 육군첩보부대에서 1959. 4. 8.경 작성된 ‘첩보보고서 주5) ’에 의하면, 피고인은 육군첩보부대에 자수한 후 심문 과정에서 북한에서 교육받은 사항, 침투요령, 임무, 접선방법, 귀환방법 등에 대하여 상세히 진술하였고, 침투요령으로 HID를 찾아가 위장자수하라고 했다는 사실과 HID에서 조사를 받을 때 진술할 내용에 대하여 교육받은 사실까지 진술한 것으로 보인다. ③ 육군특무부대는 1959. 4. 24.경 서울지방검찰청에 ‘지령을 받고 1957. 10. 6. 개성남방으로 남침 및 서울에 잠복 암약 중이던 자’라는 단순 간첩 혐의의 범죄사실로 구속영장 청구를 주6) 의뢰하여 서울지방법원으로부터 구속영장을 발부받았다. 위 구속영장 청구 당시 입증자료로 기재된 1959. 4. 24.자 ‘자백서 주7) ’에도 피고인이 북한으로부터 부여받은 임무에 관한 사항만 기재되어 있을 뿐 위장자수에 관한 내용은 기재되어 있지 않다. ④ 육군특무부대에서 1959. 5. 2.경 작성되어 중앙고등군법회의에 제출된 ‘송치의견서 주8) ’에는 “피고인이 북한에 포섭된 후 대남간첩 밀봉교육을 받고 서울에 잠입하였다.”라는 내용의 범죄 혐의만 기재되어 있을 뿐 ‘위장자수’라는 취지의 기재는 없으며, 오히려 “서울에 잠입한 후 임무수행을 할 의사를 포기하고 소속부대에 복귀하고자 사방에 탐문하여 육군첩보부대에 자수한 자이다.”라는 기재가 포함되어 있다 주9) . ⑤ 육군특무부대에서 1959. 5. 5.경 작성된 ‘괴뢰대남간첩 인수처리결과보고 주10) ’에는 “본명은 6·25 전후를 통하여 대북공작에 종사한 자임으로 민간재판에 회부할 시는 군의 대북공작기밀이 누설되어 차기 공작에 막대한 지장이 있을 것임으로 소관 서울지검과 절충하여 1959. 5. 4. 중앙고등군법회의에 송치 처리하였음”이라고 기재되어 있을 뿐 위장자수하였다는 취지의 기재는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⑥ 위 ‘간첩 피고인 심문경위’는 육군첩보부대에서 피고인이 공소제기된 이후인 1959. 5. 13.경 작성한 후 추송하였는데, 기존의 문서들, 즉 육군첩보부대에서 1959. 4. 8.경 작성한 ‘첩보보고서’ 등에는 기재되어 있지 않은 피고인이 ‘위장자수’하였다는 새로운 내용이 추가로 기재되어 있다. (3) 증인 재심청구인의 법정진술의 신빙성 재심청구인인 피고인의 아들 재심청구인이 이 법정에서 한 다음과 같은 증언은 그 진술 내용이 실제 경험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구체성을 띠고 있고, 진지한 법정진술 태도와 그 진술 내용에 배치되는 정황이나 자료가 보이지 않는 점 등을 종합하면, 피고인은 육군첩보부대에서 대북공작 임무를 부여받고 북파되었다가 북한 측에 체포된 상태에서 아들이 어린 나이에 육군첩보부대에서 북파공작원으로 훈련받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아들을 구하기 위해 북한에 전향한 것처럼 가장하여 우리나라로 남파되는 방법으로 돌아와 곧바로 육군첩보부대에 진정하게 자수하였을 수 있다는 의심을 배제하기 어렵다. ① 증인은 10대 후반인 1960년대 말부터 아버지의 행방을 찾고자 북파공작원 부대의 관계자들과 동료들을 수소문하여 찾아다니면서 이야기를 듣고, 여러 정부기관을 수소문한 결과 아버지가 1955년 9월경 북파공작원이 되어 북파된 것으로 알게 되었다 주11) . ② 증인의 나이 만 6세였던 1955년경 아버지가 근무한다는 부대인 강원도 화진포 소재 ○○지구대 소속 △△지대를 외숙모와 함께 찾아갔으나, 이미 아버지가 북파된 후여서 아버지를 만나 볼 수 없었다. 오히려 증인은 당시 지대장에 의해 약 1년 6개월 정도 ○○지구대 소속 △△지대에 머물게 되었고 주12) , 이후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북파공작원이 되는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 주13) . ③ 증인은 이후 다시 부대를 찾아온 외숙모에 의해 북파공작원 부대에서 풀려나 외삼촌 댁에서 지내게 되었다. 증인이 초등학교 2학년 때인 1957년 10월경 어느 날 새벽에 아버지가 외삼촌 댁으로 찾아왔고 주14) , 당시 아버지는 “너 부대에서 훈련받았니?”라고 물은 후 어른들과 한참 대화를 나누고 떠났는데, 후에 듣기로 부대에 급히 가야 한다고 말하고 떠났다고 한다 주15) . ④ 한동안 아버지를 만나지 못하다가 증인이 초등학교 4학년 때인 1959년경 어느 날 외숙모와 함께 삼각지 육군본부 가옥에서 아버지를 만났다. 당시 아버지는 포승에 묶이거나 수갑을 차고 있지 않았고 민간복에 자유스럽게 만났으며, 당시 증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만나고 하였다 주16) . 당시 아버지는 외숙모에게 “큰 걱정 안 해도 된다. 곧 나갈 것 같다.”라고 말하였다 주17) . ⑤ 증인은 아버지 사건과 관련하여 아버지의 지인들로부터 “아버지는 6·25전쟁 때 혁혁한 공을 많이 세웠던 분이다. 아버지는 간첩을 하실 분이 아니다. 아버지는 북파공작원 훈련을 받던 어린 너를 구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다시 남으로 오신 것이다. 군부대가 북파공작원인 아버지를 사회에 복귀시키기가 어려워 아버지를 죽였을 것이다.”라는 취지의 말을 많이 들었다 주18) . (4) 위와 같은 당시 수사서류에서 보이는 의문점과 이 법원의 증인조사의 결과 등을 종합하면, 검사가 제출한 증거가 이 사건 공소사실에 대하여 합리적인 의심을 배제할 정도로 충분한 증명력을 갖춘 것으로 보기 어렵고, 달리 이 사건 공소사실을 인정할 증거를 찾기 어렵다 주19) . 3. 결론 그렇다면 이 사건 공소사실은 범죄의 증명이 없는 경우에 해당하므로 형사소송법 제325조 후단에 의하여 피고인에 대하여 무죄를 선고한다. (덧붙여, [별지]와 같이 재심청구인에 대하여 재판부의 사과와 위로를 전한다) 판사 이원범(재판장) 이성율 김도현 주1) 기록상 공소장은 확인되지 않는다. 단지 송치의견서, 판결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 내용 등에 의하면, 피고인은 당시 육군특무부대의 송치의견서에 기재된 것처럼 ‘임무를 포기하고 자수한 간첩’으로 기소되었으나, 공판과정에서 ‘위장자수한 간첩’으로 그 공소사실이 변경된 것으로 보인다(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진실규명결정서 16쪽). 주2) 국방경비법은 1962. 1. 20. 각 제정된 군법회의법과 군형법에 의해 대체되었다. 1962. 1. 20. 법률 제1004호로 제정된 군법회의법 부칙 제4항은 “본법 시행 후에 공소를 제기한 사건에 대하여는 본법을 적용한다. 단, 본법 시행 전에 국방경비법, 해안경비법 또는 기타 법률에 의하여 행한 소송행위의 효력에는 영향을 미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였고, 같은 날 법률 제1003호로 제정된 군형법 부칙 제3항은 “(범인에게 유리한 법의 적용) 본법 시행 전에 범한 죄에 대하여는 형의 경중에 관한 것이 아니더라도 범인에게 유리할 때에는 국방경비법 또는 해안경비법을 적용한다.”고 규정하여 기존에 공소제기된 범행에 대하여도 국방경비법이 적용될 수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 아울러 현행 군형법 제13조(간첩) 제3항 제1호에는 이 사건 재심대상판결의 처벌법조인 국방경비법 제33조와 유사한 내용으로 “부대·기지·군항(군항)지역 또는 그 밖에 군사시설 보호를 위한 법령에 따라 고시되거나 공고된 지역에서 적을 위하여 간첩행위를 한 사람은 사형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주3) 재심대상판결의 재판부는 1959. 12. 2. 피고인에 대하여 사형을 선고하여 같은 날 확정되었고, 그로부터 약 1년 반이 경과된 시점에 그 형이 집행되었다(피고인의 변호인이 제출한 2012. 3. 13.자 문서송부촉탁신청서에 첨부된 ‘수용자인명부’ 및 ‘사형집행결과보고서’ 참조). 주4) 증거기록 194쪽. 주5) 증거기록 261쪽 이하. 주6) 증거기록 182쪽 이하. 주7) 증거기록 227쪽 이하. 주8) 증거기록 175쪽 이하. 주9) 나아가 위 송치의견서상 의견란에는 “본건 피의자의 소위는 국방경비법 제33조에 해당하나 공훈이 유함으로 정상을 참작하여 의법 처단함이 가하다고 사료함”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주10) 증거기록 187쪽 이하. 주11) 재심청구인에 대한 증인신문조서 2, 3쪽. 주12) 재심청구인에 대한 증인신문조서 4쪽. 주13) “여러 종류의 훈련을 받았는데, 산행훈련은 너무 많이 받아서 잊히지 않고 제가 여러 번 물에서 죽을 뻔했었는데 생존법, 기타 무기 다루는 것은 일찍이 터득하였고, 은폐, 엄폐, 북한노래 등을 배웠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때부터 △△지대 군인들은 증인에게 아버지를 만나러 가려면 배워야 한다고 하면서 군사훈련을 시키기 시작했습니다.”(재심청구인에 대한 증인신문조서 5쪽), “증인이 받았던 훈련은 산행훈련, 수상훈련, 엄폐훈련, 국군제식훈련, 인민군제식훈련, 사격훈련, 수류탄투척훈련, 북한노래 따라 부르기 등이었습니다. 강원도 깊은 산에서 산행훈련을 하면서 시키는 대로 하려면 힘들었지만, 그 당시에는 훈련인지도 모르고 했었고, 가장 공포스러웠던 것은 물에 빠져 죽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는데 김일성 별장 앞의 화진포라는 호수에 증인을 내던져 놓으면 살아나와야 했고 나오면 다시 집어넣었는데 당시 훈련을 시켰던 2명 중 한 명이 ‘죽어, 죽어’라고 하자 다른 한 명이 ‘놔둬’라고 하는 말이 물속에서 들렸었던 것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재심청구인에 대한 증인신문조서 6쪽). 주14) 재심청구인에 대한 증인신문조서 8쪽. 주15) 재심청구인에 대한 증인신문조서 9쪽. 주16) 재심청구인에 대한 증인신문조서 9쪽. 주17) 재심청구인에 대한 증인신문조서 10쪽. 주18) 재심청구인에 대한 증인신문조서 15쪽. 주19) 피고인은 1923년 강원 철원에서 출생하여 1943년 일제 관동군에 입대하였고, 1945년 북한 인민군 보안대원이 되었다가 1949년 밀항방조죄로 인민재판에서 징역 6월을 선고받고 축출되었고, 1950년 10월 철원에서 국군 치안대장이 된 후 후퇴하는 국군을 따라 남하하여 육군첩보부대원이 되어 북파되었다는 내용의 기사가 일간지에 게재되기도 하였다(증 제4호증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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